포스트 모더니즘: 문화라는 가면을 쓴 마르크스주의

  1960년대 말 무렵부터 소련과 중국의 공산 전체주의 체제의 잔혹함이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마르크스주의를 지적으로 방어하기가 어려워지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대부분 프랑스 지식인들로서 1960년대에 학생운동에 참여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다. 좌익은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이 연관되었다는 주장은 황당한 음모라고 주장하지만 그렇지 않다. 대부분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분명히 자신이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밝혔다. 포스트모더니즘도 프랑크푸르트학파처럼 경제적 억압을 문화적 억압으로, 경제관계를 권력관계로 슬쩍 바꿔치기하고 마르크스주의 대신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을 뿐이다. 좌익이 모두 포스트모더니스트는 아니지만 좌익진영에서 사실상 담론을 주도해나가는 세력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세상을 억압받는 집단억압하는 집단으로 양분한다. 억압받는 집단은 선하고 억압하는 집단은 악하며, 개인은 그저 이 두 집단 중 한쪽에 소속된 구성원일 뿐이다.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포스트모더니즘의 적, 즉 억압의 주체는 ‘그리스-로마 문명과 유대그리스도교에 바탕을 둔, 제국주의적이고 폭력적이며 가부장적이고 탐욕에 물든 자본주의적’ 서구문명이다. 따라서 서구문명을 대표하는 상징들과 서구문명이 이룬 업적들을 해체하고 비판하고 권좌에서 끌어내려야 한다. 억압자에 대한 비판은 정당하고 피억압자에 대한 비판은 “정치적 정도를 벗어난 증오 발언(politically incorrect hate speech)”이므로 논리적으로 반박할 가치도 없다고 여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피억압 집단의 규정을 바탕으로 한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를 개발했는데, 이 이념에 바탕이 되는 전제들은 개인주의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여성, 소수인종, 동성애자 등을 각각 공동의 이해를 지닌 집단으로 본다. 그리고 한 집단이나 문화를 외부와 단절된 폐쇠된 상자로 보고 그 상자 속에서 내부적 갈등이 존재하지 않으며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담론에서 보편적인 개념과 기준이라는 잣대를 들이대 비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런 극단적 상대주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대상이 있다. 바로 포스트모더니스트 자신들이 속한 서구문명이다. 서구문명은 그 어떤 문명보다도 여성, 성소수자, 소수인종의 권리를 존중하고 민주주의적인 규범을 따르는 문명인데도 그들은 서구문명이 억압적이라고 폄하한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그들이 피억압자로 규정한 집단에 대한 정당한 비판에 논리적으로 반박하지 않고 그런 비판을 여성혐오misogyny이고 인종차별racism이며 동성애혐오homophobia이고 이슬람혐오islamophobia이고 제국주의imperialism적인 사고라고 매도한다. 그러면서 여성을 억압하고 동성애자와 이교도를 처형하고 정교분리가 기반인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전체주의적 집단이라 해도 포스트모더니즘은 피억압자로 규정한 집단이라면 비판에서 면제된다. 또 포스트모더니즘이 피억압자로 규정한 집단의 구성원이라도 집단사고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은 “억압을 내면화internalized oppression”했다거나 억압주체가 개인의 자유라는 날조된 정보로 세뇌시켜 “허위의식false consciousness”에 가득 차있는 자들이라고 폄하한다.

  “인종차별"이나 “성차별"이라는 낙인은 개인을 초월해 기관, 제도, 문학, 언어, 역사, 법, 관습, 문명 전체에 확대 적용된다. 마르크스주의가 부르주아라는 경제계급 전체를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듯이 “제도적 인종차별institutional racism은 제도 전체, 백인이라는 집단 전체를 인종차별주의자로 규정한다. 계급투쟁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무기라면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익이 휘두르는 전가의 보도다. 오늘날 이성애자 백인 남성은 소련 공산정권의 적대계층에 준한다. 본인은 개인적으로 그 누구도 억압해본 적이 없어도 이성애자 백인 남성이면 태생이 유죄다.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사고가 조건화되면 폭력은 더 이상 필요없다. 대다수가 사회가 규정한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따르는 안정적인 전체주의에 도달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진실은 이성적인 탐구를 통해 성립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에 따라 결정되고 포스트모더니즘에서는 여성, 유색인종, 성소수자는 억압이라는 고통을 겪었기 때문에 억압주체인 이성애자 백인남성보다 훨씬 분명히 진실을 직시한다고 본다. 프롤레타리아가 부르주아보다 훨씬 도덕적 지적으로 우월하다는 마르크스주의의 복사판이다.

  오늘날 반인종차별주의anti-racism, 페미니즘feminism, 구조주의structuralism,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등 온갖 “이념(-isms)”이 학계, 문화계, 언론계, 정치계 등 사회 전체를 장악하고 있고 이러한 도그마는 인간의 언어, 사고, 행동을 엄격히 통제하고, 소련이 반체제인사들을 정신병자 취급했듯이, 이러한 도그마에서 벗어나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므로 치료가 필요한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단순히 국가권력이 폭력을 행사하고, 사상을 검열하고, 강제 수용소가 존재한다고 전체주의가 아니다. 전체주의는 개인의 사적인 견해나 관점을 지니지 못하고 독자적으로 사고하지 못하게 된 정신상태를 말하며, 사람들이 이런 상태가 되면 독재자 한 사람이 모든 걸 통제하지 않아도 사회는 전체주의화 된다.

  마르크스주의와 달리 이러한 문화적 상대주의 또는 다문화주의가 특히 교활하고 반박하기 어려운 이유는 이 이념이 서구문명의 도덕적 지적 기반을 악용하기 때문이다. 다문화주의는 겉으로는 서구문명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표방하면서 사실은 그 가치를 왜곡하고 체계적으로 훼손시킨다. 오늘날 우리는 다양성은 장점이고, 관용은 미덕이라고 끊임없이 세뇌를 당한다. 다문화주의 혁명은 사회 모든 분야에서 가치를 전복하고 있다. 판사는 법복을 입고 판사석에 앉아서 법대로 판결을 내리지 않고 스스로 사회의 변혁을 꾀하는 사회운동가 역할을 하면서 법치를 훼손하고, 지식을 자유롭게 탐구하는 요람이어야 할 대학은 소련 공산 전체주의에 맞먹을 정도로 사상과 표현을 검열하고 있다. 또한 다문화주의는 집요하고 끈질기게 평등을 추구하면서 쉐익스피어와 랩 음악의 가사는 “똑같이 타당한 시각”을 지닌 텍스트로 취급하고 일탈적이고 범죄적인 행동은 그저 “색다른 생활방식”으로 여긴다.

  다문화주의는 마르크스주의처럼 노골적으로 표현을 억압하고 검열하는 대신 은밀한 방식으로 여론을 조작한다. 영화나 TV 드라마에 끊임없이 성차별과 인종차별 모티프를 삽입해 여성, 성소수자, 유색인종은 긍정적인 롤 모델로 묘사하고 이성애자 백인 남성은 덜 떨어지고 사악하고 편협하고 타락한 인물로 묘사한다. “마르크스주의 예술가는 현상이 아니라 당위를 제시해야 한다”라고 한 독일 극작가이자 연출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원칙을 충실히 실천하고 있다. 사회의 해악인 자본가를 타도하는 강건한 프롤레타리아를 묘사한 소련식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복사판이다.

  다문화주의자는 마르크스주의자처럼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애 대한 반론을 용납하지 않는 절대주의자인 동시에 적으로 지목한 대상을 공격하기 위햐서 다른 모든 이념들을 포용하는 상대주의자다. 다문화주의자는 반대세력은 모두 색출해 제거해야 하며, 일단 다문화적 낙원을 건설하고 나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이를 방어하려 한다. 이런 사회는 전체주의를 향해 나아가게 된다. 강제노동수용소는 없지만, “이성애자 백인남성의 패권적 담론”에 사로잡힌 이들을 재교육시키고 감수성 훈련, 인종차별과 성차별 정서 퇴치 훈련을 시킬 시설이 생겨난다. 소련 공산당이 감시하는 경성 전체주의가 아니라 우리 두뇌가 스스로 교도관 역할을 하는 연성 전체주의가 된다. 우리는 자유로운 사고를 해야 한다는 짓눌림에서 해방되어 PC 문화를 위반하는 이단자가 될 능력조차 상실하게 된다.

  (...) 논리, 객관적 증거, 사실, 이성적 사고, 가치 추구보다는 상대주의, 다양성, 다문화주의, 감정, 주관, 배려, 공감, 포용을 내세우는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늘날 학계 전반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객관성은 상호주관성, 즉 합의로 대체되고 진실, 사실, 가치는 타협을 통해 합의 가능한 것으로 변질된다. 그런데 진실보다 합의를 우선시하고 주관론과 상대주의를 신봉하는 이들이 우익의 시각만큼은 절대로 용인하지 않고 철저히 검열하는 이중성을 보인다. 포스트모더니즘-신좌익이 말하는 합의는 우익이 좌익의 주장을 일반적으로 수용하는 상태를 일컬을 뿐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본질적인 문제는 온정적이고 친화적인 기질만 강조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으며 목표지향적인 기질은 폄하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이다. 사람에게는 포용과 친화성뿐만 아니라 자기향상과 상승욕구도 필요하다. 즉, 노력해서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목표가 있으려면 가치의 위계질서가 있어야 한다.

  (...) 포스트모더니즘은 본질적으로 서구의 개인주의적 자본주의적 문명은 타락해 구제불능이고 본질적으로 최대한의 권력을 지닌 사람들에게만 혜택이 가도록 구축된 체제라고 가정한다. 성차별적, 인종차별적, 가부장적, 자본주의적 서구문명 체제는 이성애자 백인 남성들이 오직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구축한 체제로서 이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고 유지되도록 하기 위해 구축된 논리, 합리성, 대화와 같은 바람직한 요소들은 오직 권력에 눈이 먼 상층부 소수가 세계를 지배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욕구에서 나온 부산물에 불과하며 이와 관련해 창출된 부는 억압에서 비롯된 결과라고 본다.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지금까지 인간이 창조한 사회 가운데 폭압적인 측면, 타락한 측면이 없는 사회가 없었다. 그런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서구 문명을 비판할 때 여러가지 개념적 오류를 범한다.

  서구문명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지금까지 존재해온 모든 문명들과 비교 평가해야 타당한데 포스트모더니즘 좌익이 권력을 잡았을 경우에 구축할 가상의 이상향과 서구문명을 비교한다. 마르크스주의 이상향은 이를 추구한 마오쩌둥, 스탈린, 폴 포트, 카스트로 등 모든 정권을 통해 참담한 실패로 판명되었다. 1억 명 이상이 그 이념 때문에 죽었는데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한가? 라고 반박하면 그들이 추구한 마르크스주의는 진정한 의미의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며 포스트모더니즘 좌익이 권력의 고삐를 쥐면 과거의 마르크스주의 하에서 살인마로 변한 10여 개 정권에서 일어난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으며 현재의 끔찍한 서구문명보다 훨씬 바람직한 유토피아를 구축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포스트모더니즘 하에서는 모두가 발맞춰 유토피아를 향해 전진한다는 것이다. 그나마 인류가 이 정도라도 애써 구축해놓은 서구문명이라는 구조를 가상의 이상향 때문에 침몰시키려는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 이상향이 실현되면 어떤 모습인지 이미 처절하게 끔찍한 경험을 했으면서도 말이다. 정말 경악스럽고 오만하고 자기도취적이다. 나는 선하므로 내가 권력을 잡으면 다르리라는 생각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신념이고 그런 신념을 가진 인간은 반드시 독재를 한다.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면서 결과가 다르기를 바라는 것은 광기다. 절대 권력은 좌우를 막론하고 반드시 부패한다.

  포스트모더니즘 좌익이 추구하는 유토피아와 비교하면 서구문명은 끔찍한 체제일지 모르지만 유토피아를 구축하겠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초래할 체제보다는 훨씬 낫다. 서구문명에는 결함도 많지만 인류 역사상 그 어느 문명도 그토록 짧은 기간 동안 그토록 많은 이들에게 그토록 많은 혜택을 누리도록 해준 문명은 없다. 서구문명은 억압으로 점철되었고 백해무익하다는 주장은 말도 안 된다. 물론 서구사회에도 편견 때문에 자격이 있는데도 그에 합당한 지위를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노력과 능력이 성공을 예측해주는 강력한 변인이라는 점은 서구문명이 지닌 강력한 장점이며 다른 문명에서는 그나마 노력과 능력도 별 소용이 없는 경우가 많다. 물론 서구사회의 최상층부가 모두 지적이고 근면하다는 뜻은 아니며 노력과 능력 말고도 성공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많다. 그러나 세계적으로 인구의 이주 방향을 살펴보면 대부분 비서구사회에서 서구사회로 이동하지 그 반대의 경우는 매우 드물다는 사실은 서구사회는 결함 못지않게 많은 장점이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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